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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부정 선거로 인한 3.15 의거 민주화의 시발점

by 인생은 웃음 2023.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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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의거 발원지 민주화의 시발점
3.15 의거 발원지 민주화의 시발점

3.15 의거는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 선거에 반발하면서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시위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입니다.

김주열 학생의 시체
김주열 학생의 시체

4월 11일 시위 중 실종된 김주열 학생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2차 시위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전국적인 시위로 확대되면서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을 이끌어냈다. 이 3.15 의거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의거의 배경

3.15 의거
3.15 의거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장기 집권하기 위해 선거 준비부터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따라 대구에서는 선거 준비 과정에서 학생들의 첫 시위(2·28 시위)가 벌어지게 됐다. 당시 대구에서는 민주당 유세날에 학생들이 유세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요일에도 고등학생들을 등교하게 하였다.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정부의 불법적 선거 개입을 비판하는 시위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유당 정권은 3월 15일 선거 당일 사전투표, 3인조, 9인조 공개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부정행위 결과로 개표 과정에서 부통령 이기붕의 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면서 이를 79%로 하향 조정하는 촌극이 벌어지기고 했습니다. 완전히 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독재 시대라 보니 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공연한 부정행위가 목격되자 마산 시민들은 "협잡선거 물리쳐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위의 전개

3.11 의거 이동 경로
3.11 의거 이동 경로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의 투표 부정에 반발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하여 나서자, 경찰은 최루탄 및 총기로 무차별 발포를 가하면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이 주도한 좌익 폭동이라고 발표하여 마산 시민들의 반발을 고조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4월 11일에 28일 동안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이에 분노한 마산 시민들의 2차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산 의거를 도화선이 되어,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처럼 전 국민적 분노로 확대되면서 시위의 목적도 부정선거를 무효화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의 퇴진 자체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4·19 혁명으로 이어지다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이어서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의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적인 발포에 나섰고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이 같은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국 선언문 발표 등이 이어지자,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되었으며, 자유당 정권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발점들이 발생을 하면서 민주화로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가져가는 시대의 흐름을 발아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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